특별자료 : 가나안 Canaan
12지파에 대한 토지 분배
가나안을 정복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정착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들은 사실 한 가족이 아니었다. 각 지파들로 나뉘어져 있어서 자기들의 땅이 있어야만 했다.
1. 분배 방식
땅을 분배하는 데 있어서 한꺼번에 12지파의 몫으로 땅을 나눈 것이 아니라 모세가 임의대로 3개 지파에게 먼저 지분을 내주었고 여호수아가 또한 유다 지파와 요셉 족속, 즉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에 배분을 한 나머지를 7등분하여 나머지 7지파에게 나누어 주었다. 므낫세 반 지파와 함께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은 요단 동편에서 그 기업을 모세에게 받았다(수13:8). 유다 지파는 남쪽편 자기 경내에 거하였다(수18:1-10). 요셉 족속, 즉 므낫세 반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는 북쪽편 자기 경내에 거하게 되었다. 그리고나서 "그 남은 땅을 일곱 부분으로 그려서 이곳 내게로 가져오라"고 말하고 제비를 뽑아 12지파에게 땅이 분배되었다.
2. 경계표시
각 지파들은 이미 한 가족이 아니었다. 그래서 땅을 분배받을 때도 그 경계를 분명히 해주지 않으면 많은 문제가 생길 수가 있었다. 그래서 각 지파의 땅을 구분 짓는 경계를 설정하였다. 그것이 바로 지형의 특징물이다. 경계표로 사용된 지형적 특징물들은 대개 산, 산비탈, 강, 평야, 샘 등이다. 예를 들면, '하맛에 들어가는 곳까지'(수13:5), '메드바 곁에 있는 온 평지'(수13:16), '서편으로 지나서 가나 시내에 미치나니 그 끝을 바다'(수16:8)등이 있는데, 주로 산, 시내, 바다 등 변함없고 쉽게 식별할 수 있는 지형물들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부 다 명확하게 경계를 표시한 것은 아니고, 사사 시대에 들어서야 그 경계들이 정리되었다. 주로 잇사갈, 시므온, 단 지파와 요단강 동편의 지파들의 경계가 그런데 사사 시대로 넘어오면서 서로서로의 관계성에 의해 그 경계가 정해졌다.
3. 분배의 기준
각 지파별로 분배된 땅의 크기를 지도로 보면 그 규모가 서로 많이 차이난다. 그래서 상식적으로는 분배의 기준이 인구비례로 하지 않았나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땅의 규모와 인구비례를 대비해 보면 꼬 그렇지만도 않다. 예를들면, 므낫세 지파는 그 인구가 5만인데 비해 비교적 더 넓은 지역을 분배받았고 잇사갈 지파는 6만의 인구인데 비하여 작은 토지를 받았다. 인구가 3만밖에 안되는 에브라임 지파에 비해 4만의 인구인 베냐민 지파는 더 작은 땅을 분배받았다. 땅의 규모로 보면 불평등한 분배였음에도 불구하고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은 것은 아마도 인구비례보다 더 중요한 기준이 있었을 것이다. 성경을 보면 분배 받았다가기보다 서로 의견 교환으로 적당히 분배했다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땅의 구획을 그릴 때 매 지파의 대표 3인이(수18:4) 이미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구획 정리를 한 것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주거지역으로서의 땅이 아닌, 경작지로서의 땅 구획이 아니었을까 한다. 땅의 규모는 비록 작지만 비옥한 곳이라면 만족했을 것이다. 각 지파에서 뽑혀온 사람들은 누가 차지하건간에 공평하게 들어가서 농사짓고 살 수 있도록 비옥한 땅과 볼모지를 잘 섞어 구획 정리를 했을 것이다. 이것은 5개 지파가 이스라엘 평야를 중심으로 집결되어 있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가 있다. 비옥한 평야가 있다면 골고루 여러 지파에게 분배 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4. 레위 지파의 배분
레위 지파는 다른 12지파들처럼 땅을 배분받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너희 중에 분깃이 없나니 여호와으 ㅣ제사장 직분이 그들의 기업이 됨이며"(수18:7)라고 제외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들이 기거할 곳으로 각 지파에서 제공된 48성읍이 분배되었다(수21:41). 그런데 그 48성읍의 배치를 보면, 대체로 국경 지역의 변방과 중심 지역에 위치해 있다. 이 당시에 레위인들은 그들 자체가 제사장이요, 성전과도 같은 그런 존재의 의미를 갖는다. 레위인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 '정결케'된 사람이며, '구별'된 사람이다(민8:6,14).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도 함께 하실 것이라고 믿었고 그들이 거하는 변방의 성읍에는 하나님도 함께 하시어 자기 백성들을 이방인들로부터 지켜 주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5. 땅 구획의 과정
만사가 그렇듯이 한꺼번에 그리고 일시에 결정되는 일은 쉽지가 않다. 특히 자손대대로 전해질 땅을 나누고 경계를 짓는 문제는 더욱 그렇다. 분쟁이 있을 수밖에 없고, 변경되기 일쑤이다. 자세한 정황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런 과정들을 짐작하게 하는 구절들이 있다. 첫번째로는 "답부아 땅은 므낫세에게 속하였으니 므낫세 경계에 있는 답부아 읍은 에브라임 자손에게 속하였으며"(수17:8,9)라는 기록과 "잇사갈과 아셀에도 므낫세의 소유가 있으니"(수17:11)라는 기록이다. 한 지파의 토지 안에 다른 지파 소유의 성읍이 있다는 뜻이다. 이것을 히브리 대학의 아하로니 박사는 "원래 잇사갈과 아셀에 속했던 성읍이 후에 므낫세 지파에게 정복되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둘째로는 "아무리 사람이 단 자손을 산지로 쫓아 들이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지 아니하고"(삿1:34)라는 기록과 "그 성읍을 단이라 하니라 그 성읍의 본 이름을 라이스어라"(삿18:29)는 기록을 통해 단 지파의 이름을 알 수 있다. 아모리 족속에 쫓겨 분배받은 땅을 뒤로하고 쫓겨났던 단 지파는 거할 곳을 찾다가 라이스라는 곳을 정탐하고, 전쟁을 해도 승리할 만함을 알고 그곳을 정복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단이라고 고쳐 부르고 정착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들을 거쳐서 이스라엘의 12지파는 각자의 땅을 분배받아 유지, 확정하고 이동하며 번성하게 된 것이다.
지명연구 : 가다라 Gadara
1. 위치
1) 갈릴리 바다 남단에서 남동쪽으로 약 10Km지점에 위치한다.
2) 이 성읍과 주변 마을의 거민들은 주로 비(非)유대계 사람들이었다.
3) 데가볼리 성읍 중에 하나로 얄묵 강가의 아미타 온천 지대로부터 4.5Km 떨어진 언덕 꼭대기에 자리했다.
4) 3.5Km나 되는 고대 성벽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극장, 사원, 공회당 등의 건물 자취를 통해 거대한 도시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5) 그들이 사용했던 동전에 배 그림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 행정권이 갈릴리 바다 동쪽 지방까지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6) '가다라인의 땅', '거라사인의 땅' 기록으로 보아 제2의 가다라가 있었던 것이 확실시된다.
2. 역사
1) 주전 218년 : 마카베오 전쟁시 알렉산더 얀나이우스가 10개월 간 포위 끝에 점령하였다.
2) 주전 63년 : 로마 정복 후, 폼페이우스에 의해 재건되어 자유 도시가 되었다. 그후, 가비니우스는 팔레스타인의 다섯 점령 지역 중 하나로 만들어 지방 의회를 설치하였다.
3) 주전 30년 : 헤롯 대왕의 폭정이 심했다.
4) 주전 4년 : 헤롯이 죽은 후, 시리아 지방에 편입되었다.
5) 주후 70년 : 유대인의 반란 기간 동안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 함락되었다.
6) 주후 240년 : 기독교 교회가 생겼다.
7) 주후 325년 : 회교도들이 점령하기 전까지 감독이 있었다.
3. 복음서에 나타난 가다라
1) 신약에서 가다라는 군대 귀신 들린 자가 치유되고 군대 귀신이 돼지에게 들어가자 돼지들이 갈릴리 바다에 뛰어 들어 몰사한 사실이 언급되었다(막5:1눅8:26 같은 사건에 대한 기록).
2) 마태복음은 '가다라'로, 누가복음은 '거라사'로 각각 철자를 다르게 사용하였다.
3) 지리나 역사적 자료를 보면 '거라사의 가다라'로 나와 있어 중복된 명칭으로 추정된다.
4) 이 자료들에 의하면 가다라는 제한된 지역의 주성이고, 거라사는 가다라까지 포함한 넓은 지역을 가리킨다.
5) 현재까지 남아있는 케르사와 게르가가 거라사의 원형일 가능성이 있다.
4. 고고학적 발굴 및 유적
1) 가다라는 오늘날 요르단의 무케이스 또는 움 케이스와 동일한 장소로서 얄묵 강의 남부 골짜기가 보인다.
2) 두 개의 원형 경기장, 바실리카 회당, 사원, 줄지어 서 있는 건물 기둥들, 큰 주택들, 수도 등 페허의 잔해들이 발견되었다.
3) 길 양쪽으로 가로수를 심은 포장도로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뚫려 있으며 이 위로 전차가 굴러간 바퀴 자국을 지금도 볼 수 있다.
특별자료 : 가나안 Canaan
12지파에 대한 토지 분배
가나안을 정복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정착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들은 사실 한 가족이 아니었다. 각 지파들로 나뉘어져 있어서 자기들의 땅이 있어야만 했다.
1. 분배 방식
땅을 분배하는 데 있어서 한꺼번에 12지파의 몫으로 땅을 나눈 것이 아니라 모세가 임의대로 3개 지파에게 먼저 지분을 내주었고 여호수아가 또한 유다 지파와 요셉 족속, 즉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에 배분을 한 나머지를 7등분하여 나머지 7지파에게 나누어 주었다. 므낫세 반 지파와 함께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은 요단 동편에서 그 기업을 모세에게 받았다(수13:8). 유다 지파는 남쪽편 자기 경내에 거하였다(수18:1-10). 요셉 족속, 즉 므낫세 반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는 북쪽편 자기 경내에 거하게 되었다. 그리고나서 "그 남은 땅을 일곱 부분으로 그려서 이곳 내게로 가져오라"고 말하고 제비를 뽑아 12지파에게 땅이 분배되었다.
2. 경계표시
각 지파들은 이미 한 가족이 아니었다. 그래서 땅을 분배받을 때도 그 경계를 분명히 해주지 않으면 많은 문제가 생길 수가 있었다. 그래서 각 지파의 땅을 구분 짓는 경계를 설정하였다. 그것이 바로 지형의 특징물이다. 경계표로 사용된 지형적 특징물들은 대개 산, 산비탈, 강, 평야, 샘 등이다. 예를 들면, '하맛에 들어가는 곳까지'(수13:5), '메드바 곁에 있는 온 평지'(수13:16), '서편으로 지나서 가나 시내에 미치나니 그 끝을 바다'(수16:8)등이 있는데, 주로 산, 시내, 바다 등 변함없고 쉽게 식별할 수 있는 지형물들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부 다 명확하게 경계를 표시한 것은 아니고, 사사 시대에 들어서야 그 경계들이 정리되었다. 주로 잇사갈, 시므온, 단 지파와 요단강 동편의 지파들의 경계가 그런데 사사 시대로 넘어오면서 서로서로의 관계성에 의해 그 경계가 정해졌다.
3. 분배의 기준
각 지파별로 분배된 땅의 크기를 지도로 보면 그 규모가 서로 많이 차이난다. 그래서 상식적으로는 분배의 기준이 인구비례로 하지 않았나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땅의 규모와 인구비례를 대비해 보면 꼬 그렇지만도 않다. 예를들면, 므낫세 지파는 그 인구가 5만인데 비해 비교적 더 넓은 지역을 분배받았고 잇사갈 지파는 6만의 인구인데 비하여 작은 토지를 받았다. 인구가 3만밖에 안되는 에브라임 지파에 비해 4만의 인구인 베냐민 지파는 더 작은 땅을 분배받았다. 땅의 규모로 보면 불평등한 분배였음에도 불구하고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은 것은 아마도 인구비례보다 더 중요한 기준이 있었을 것이다. 성경을 보면 분배 받았다가기보다 서로 의견 교환으로 적당히 분배했다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땅의 구획을 그릴 때 매 지파의 대표 3인이(수18:4) 이미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구획 정리를 한 것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주거지역으로서의 땅이 아닌, 경작지로서의 땅 구획이 아니었을까 한다. 땅의 규모는 비록 작지만 비옥한 곳이라면 만족했을 것이다. 각 지파에서 뽑혀온 사람들은 누가 차지하건간에 공평하게 들어가서 농사짓고 살 수 있도록 비옥한 땅과 볼모지를 잘 섞어 구획 정리를 했을 것이다. 이것은 5개 지파가 이스라엘 평야를 중심으로 집결되어 있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가 있다. 비옥한 평야가 있다면 골고루 여러 지파에게 분배 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4. 레위 지파의 배분
레위 지파는 다른 12지파들처럼 땅을 배분받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너희 중에 분깃이 없나니 여호와으 ㅣ제사장 직분이 그들의 기업이 됨이며"(수18:7)라고 제외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들이 기거할 곳으로 각 지파에서 제공된 48성읍이 분배되었다(수21:41). 그런데 그 48성읍의 배치를 보면, 대체로 국경 지역의 변방과 중심 지역에 위치해 있다. 이 당시에 레위인들은 그들 자체가 제사장이요, 성전과도 같은 그런 존재의 의미를 갖는다. 레위인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 '정결케'된 사람이며, '구별'된 사람이다(민8:6,14).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도 함께 하실 것이라고 믿었고 그들이 거하는 변방의 성읍에는 하나님도 함께 하시어 자기 백성들을 이방인들로부터 지켜 주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5. 땅 구획의 과정
만사가 그렇듯이 한꺼번에 그리고 일시에 결정되는 일은 쉽지가 않다. 특히 자손대대로 전해질 땅을 나누고 경계를 짓는 문제는 더욱 그렇다. 분쟁이 있을 수밖에 없고, 변경되기 일쑤이다. 자세한 정황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런 과정들을 짐작하게 하는 구절들이 있다. 첫번째로는 "답부아 땅은 므낫세에게 속하였으니 므낫세 경계에 있는 답부아 읍은 에브라임 자손에게 속하였으며"(수17:8,9)라는 기록과 "잇사갈과 아셀에도 므낫세의 소유가 있으니"(수17:11)라는 기록이다. 한 지파의 토지 안에 다른 지파 소유의 성읍이 있다는 뜻이다. 이것을 히브리 대학의 아하로니 박사는 "원래 잇사갈과 아셀에 속했던 성읍이 후에 므낫세 지파에게 정복되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둘째로는 "아무리 사람이 단 자손을 산지로 쫓아 들이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지 아니하고"(삿1:34)라는 기록과 "그 성읍을 단이라 하니라 그 성읍의 본 이름을 라이스어라"(삿18:29)는 기록을 통해 단 지파의 이름을 알 수 있다. 아모리 족속에 쫓겨 분배받은 땅을 뒤로하고 쫓겨났던 단 지파는 거할 곳을 찾다가 라이스라는 곳을 정탐하고, 전쟁을 해도 승리할 만함을 알고 그곳을 정복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단이라고 고쳐 부르고 정착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들을 거쳐서 이스라엘의 12지파는 각자의 땅을 분배받아 유지, 확정하고 이동하며 번성하게 된 것이다.
지명연구 : 가다라 Gadara
1. 위치
1) 갈릴리 바다 남단에서 남동쪽으로 약 10Km지점에 위치한다.
2) 이 성읍과 주변 마을의 거민들은 주로 비(非)유대계 사람들이었다.
3) 데가볼리 성읍 중에 하나로 얄묵 강가의 아미타 온천 지대로부터 4.5Km 떨어진 언덕 꼭대기에 자리했다.
4) 3.5Km나 되는 고대 성벽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극장, 사원, 공회당 등의 건물 자취를 통해 거대한 도시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5) 그들이 사용했던 동전에 배 그림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 행정권이 갈릴리 바다 동쪽 지방까지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6) '가다라인의 땅', '거라사인의 땅' 기록으로 보아 제2의 가다라가 있었던 것이 확실시된다.
2. 역사
1) 주전 218년 : 마카베오 전쟁시 알렉산더 얀나이우스가 10개월 간 포위 끝에 점령하였다.
2) 주전 63년 : 로마 정복 후, 폼페이우스에 의해 재건되어 자유 도시가 되었다. 그후, 가비니우스는 팔레스타인의 다섯 점령 지역 중 하나로 만들어 지방 의회를 설치하였다.
3) 주전 30년 : 헤롯 대왕의 폭정이 심했다.
4) 주전 4년 : 헤롯이 죽은 후, 시리아 지방에 편입되었다.
5) 주후 70년 : 유대인의 반란 기간 동안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 함락되었다.
6) 주후 240년 : 기독교 교회가 생겼다.
7) 주후 325년 : 회교도들이 점령하기 전까지 감독이 있었다.
3. 복음서에 나타난 가다라
1) 신약에서 가다라는 군대 귀신 들린 자가 치유되고 군대 귀신이 돼지에게 들어가자 돼지들이 갈릴리 바다에 뛰어 들어 몰사한 사실이 언급되었다(막5:1눅8:26 같은 사건에 대한 기록).
2) 마태복음은 '가다라'로, 누가복음은 '거라사'로 각각 철자를 다르게 사용하였다.
3) 지리나 역사적 자료를 보면 '거라사의 가다라'로 나와 있어 중복된 명칭으로 추정된다.
4) 이 자료들에 의하면 가다라는 제한된 지역의 주성이고, 거라사는 가다라까지 포함한 넓은 지역을 가리킨다.
5) 현재까지 남아있는 케르사와 게르가가 거라사의 원형일 가능성이 있다.
4. 고고학적 발굴 및 유적
1) 가다라는 오늘날 요르단의 무케이스 또는 움 케이스와 동일한 장소로서 얄묵 강의 남부 골짜기가 보인다.
2) 두 개의 원형 경기장, 바실리카 회당, 사원, 줄지어 서 있는 건물 기둥들, 큰 주택들, 수도 등 페허의 잔해들이 발견되었다.
3) 길 양쪽으로 가로수를 심은 포장도로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뚫려 있으며 이 위로 전차가 굴러간 바퀴 자국을 지금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