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에 효과를 나타낸다.
우리의 마음이 어둡고 악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이 외부적인 증명만으로도 우리의 믿음을 불러 일으키는 데 충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헛된 것에 기울어져 있어서 하나님의 진리에 결코 이를 수 없으며, 우둔하여 항상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보지 못한다. 따라서 성령의 조명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믿음이 인간의 이해력을 훨씬 초월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성령의 능력으로 강화되고 지원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의 지성이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조명을 받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스콜라 철학자들의 생각은 지식에서 오는 단순한 동의를 믿음과 동일시 하고 성령의 확신과 확실성을 무시해 버린다. 그러므로 믿음은 두 방면으로 하나님의 특이한 선물이다. 사람의 지성은 정화되어 하나님의 진리를 맛볼 수 있게 되며, 마음은 그 진리를 확신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성령은 믿음을 불러일으킬 분만 아니라 점진적으로 성장하게 하여, 드디어 우리를 믿음으로 인하여 천국에 가도록 인도하신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바울은 말한다.(딤후1:14) 우리는 사도가 듣고 믿음으로써 성령을 받는다고(갈3;2) 한 말을 쉽게 설명할 수 있다.
34. 성령만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신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것은 성령에 의해서이다. (고전2:16) 그리스도게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게서 d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6:44 “아버지게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6:45)라고 말씀하신다. 일찍이 아버지를 본 사람이 없으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만이 그를 보았다(요1:18과 요5:37의 융합)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이글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에게로 갈 수 없는 것과 같이 일단 끌려가면 우리의 지성과 마음은 높이 들려 우리의 이해력은 초월한 경지에 이른다. 그 때에 우리의 영혼은 성령의 조명을 받아 이를테면 새로 날카로운 시력을 얻어, 이전에 눈을 멀게 했던 그 찬란한 하늘의 비밀을 보게 된다. 또 인간적인 이해력도 이같이 성령의 빛으로 조명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일들을 드디어 참으로 맛보기 시작하며, 이전에 심히 어리석고 미각이 둔하던 것과는 달라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두 제자에게 그의 나라의 비밀을 밝히 설명하려고 하셨으나(눅24:27)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하시기까지는 (눅24:45)아무런 발전이 없었다. 비록 사도들은 이렇게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배웠지만 그들이 귀로들은 바와 같은 교훈을 그들의 마음속에 부어 넣기 위해서는 진리의 영이 그들에게 오실 필요가 있었다.(요16:13)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태양과 같이 말씀이 선포된 모든 사람에게 비취지만 , 눈먼 사람들에게는 아무 효과가 없다. 그런데 이 점에서 우리는 원래 모두 눈이 멀었다. 따라서 성령이 내면적 교사가 되어서 우리의 마음을 비추시며,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올 길을 마련하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슴은 우리의 마음에 침투할 수 없다.
35. 사람은 성령이 없이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
39.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내주를 기뻐한다.고전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하는 데 그들이 성령을 모욕하지 않고서 어떻게 우리에게 대항하여 소리를 칠 수 있는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롬8:14) 고 언명한다.
“성령만이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롬8:16)하신다고 한다.그리스도의 영으로 감동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바울은 주장한다.(롬8:9) 바울은 우리가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복된 부활의 소망이 없다고 한다.(롬8:11)
바울은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계시다는 것을 모른다면 그 사람은 버림받은 것이라고 하였다.(고후13:5)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고 요한은 말한다.(요일3:24, 4:13)
P160 보복의 심판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원수에게 복수하신다. 즉, 그들에게 진노를 발하시며 그들을 혼란에 빠뜨리시며 흩뜨리시며 좌절시킨다. 그러므로 이것은 보복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당하며 도한 하나님의 진노와 결합된 벌이다. 경계의 심판에서는 하나님의 엄하심은 노여움에 이르지 않으며, 멸망시키려고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라서 이것은 벌이나 보복이라기보다는 교정이나 경고이다.
하나는 재판관의 행동이며, 또 하나는 재판관의 행동이며, 도 하나는 아버지의 행동이다. 재판관이 악인을 벌할 때에는 그의 범행을 헤아려 범죄 자체에 벌을 가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들을 엄격하게 교정할 대에는 복수나 학대하는 것이 아니고 가르치며 더 조심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아들에게는 교정이 시련과 개선이 되며, 노예에게는 태형과 벌이 된다.
32. 하나님의 보복과의 심판과 징계의 심판은 목적이 전혀 다르다.
벌이 보복일 때는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가 나타나며, 신자들에 대해서는 그런 것을 결코 나타내시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징계가 하나님의 축복이며, 그의 사랑을 증거한다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같다. (욥5:17: 잠3:11-12; 히 12:5-6)
이 구별은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통하여 충분히 지적되었다.
불경건한 사람들이 현세에서 당하는 고통은 이르테면 일종의 지옥의 통로를 우리에게 묘사해주며, 거기서 그들은 자기의 영원한 저주를 이미 멀리 바라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생활을 고치거나 유익을 얻는 것이 아니고, 이런 초보적인 경험이 도리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무서운 음부를 위한 준비가 된다.
주께서는 자기의 종들을 엄하게 징계하시지만 죽음에 내어주지는 않는다.(시118:18) 그러므로 그들은 주의 채찍으로 맞은 것이 자기들에게 유익하였고 자기들의 진정한 교육을 촉진시켰다고 고백한다.(시119:71)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상처를 입히시므로 그들 자신은 지옥의 벌과 별로 다름이 없는 것같이 느낀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그들이 당연히 그의 진노를 받을 만하며 그래서 그들로서는 자기의 악행을 싫어하며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려고 더욱 조심하게 되어, 간절한 마음으로 속히 용서를 비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을 증거하신다.
주게서는 징계가 주의 백성을 정화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가르치시지만 백성이 과도하게 지치지 않도록 징계를 완화하신다고 부언하신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건생활에 전심할수록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더욱 민감해지기 때문이다. 악인도 하나님의 채찍을 맞으면 신음하지만 , 그는 그 일을 숙고하지 않고 도리어 자기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기 때문에 , 그 마음이 더욱 굳어진다. 그렇지 않으면 심판자인 하나님께 대해서 불평을 말하며 반항하며 고함을 지르기 때문에, 그들은 격분과 정신착란으로 마비상태에 빠진다. 그러나 신자들은 하나님의 채찍을 경고로 생각해서 즉시 자기의 죄를 깊이 반성하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용서를 간절히 빌게 된다. 가련한 영혼들의 이와같은 고민과 슬픔을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의 진노의 징조만 보이더라도 백번이나 기절할 것이다.
33. 보복의 심판은 벌하기 위한 것이며 징계의 심판은 개선하기 위한 것이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채찍을 맞을 때에,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 이미 벌을 받기 시작햇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진노의 증거를 무시한다고 해서 벌을 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벌을 받는 것은 바른 정신을 차리시게 하시려는 뜻이 아니고 큰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이 심판자이시며 처벌자이심을 깨eke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자녀들이 지팡이로 맞은 것은 죄에 대한 처벌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고 회개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벌하시는 목적은 오직 교회를 겸손하게 만들며 회개시키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나라를 빼앗았을 때에는 그에게 보복의 벌을 내리셨다.(삼상15:23)
다윗의 어린 아들을 빼앗았을 대에는 그를 교정하려고 질책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1:32)
P165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신자는 낙망하지 말라
심한 고통을 받을 때에 신자는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마음을 무장해야 한다. 내 이름으로 일컫음을 받는 렘25:29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벧전4:17)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느끼는 심한 고통이 보복이라고 믿는다면 , 그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님의 손에 맞아 그를 처벌하는 자를 심판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의 진노와 적의밖에 볼 수 없으며, 하나님의 채찍을 저주와 영원한 정죄라고 해서 미워할 수밖에 없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은 아직도 자기를 벌하실 생각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채찍을 받아 결국 유익을 얻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죄에 대해 노하시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자비하시며 인자하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다면 예언자가 자기의 경험에 대해서 불평을 말하는 것과 같은 일이 생길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불신자들을 아끼시며 그들의 범죄를 무시하면서 , 자기 백성에게 엄격하실 때는 그것은 어려운 시련이 된다.
율법으로 훈계를 받을 대에 이것으로 인해서 신자들이 바른 길로 돌아갈 때는 그들의 구원에 대한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불경건한자들이 제멋대로 과오에 돌입하는 결과는 지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고 한다.
37. 죄인이었던 여인
향유를 부은 여인
예수의 뒤에 서서 발 곁에서 울며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셨다.
그녀는 죄의 용서를 받고 그 고마움을 표시하는 저 여인의 사랑을 보고서 너는 당연히 그녀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38 그리스도의 육신은 우리의 죄를 위한 유일하고 진정한 희생이다. 세례에서 완전히 소멸된 죄뿐만 아니라, 그 후에 우리의 약점을 통해서잠입하는 죄까지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온 교회는 매일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호소한다.(마6:12) 그리고 저 유일한 희생응 통해서 죄는 용서된다.
제5장 보속설에 첨부된 면죄부와 연옥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육체에 채운다고(골1;24)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모든 신자들이- 지상생활을 계속하는 동안 단련을 받기 위하여 당하는 고통과 관련시킨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으로 한 번 당하신 고난을 지금은 그의 지체들을 통해서 매일 당하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내게는 여러분에게 가는 문이십니다.
이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피로 준비된 그의 양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값을 인정하십시오 나는 그 값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전파할 뿐입니다.
제6장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가장 강렬한 동길르 그리스도 자신과 그의 구속행위에서 얻는다.
제7장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핵심
자기 부정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성이나 의지가 우리의 계획과 행동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을 다라 우리의 유익을 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말라.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대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전 소유를 잊어 버려라.
반면에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위해 살고 그를 위해 죽으라(롬14:8, 고전6:19) 그러므로 자기의 모든 능력을 바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자기를 떠나는 것을 - 이것을 제일보로 삼아라.
바울은 이것을 “심령으로 새롭게 됨”이라고 불렀다.(엡4:23)
기독교 철학은 이성에게 성령에 양보하여 항복하며 복종하라고 명령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제부터는 사람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살며 지배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게 한다.(갈2:20)
2. 하나님께 헌신함으로 자기를 부정함
여기서부터 둘째 요점이 나온다
즉 우리는 우리의 것을 구하지 않고, 우리가 자신을 거의 잊어버리고 자신에 대한 걱정은 물론 우리의 열성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명에 충실히 바치려고 노력한다면 , 그것은 위대한 전진을 했다는 증거가 된다. 자신에 대한 근심 걱정을 버리라고 명령할 때에, 성경은 소유욕과 권세욕과 명예욕을 우리의 마음에서 씻어버릴 뿐 아니라, 인간적인 영예에 대한 야심과 갈망 그리고 그 밖의 더 깊이 숨어 있는 해독을 송두리째 뽑아버린다.
자기부정 곧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섬기려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사역의 출발점에서 가장 절실하게 요구하시는 자기부정이다.(마16:24)
이 자기 부정이 일단 제자의 마음을 점령하면, 그것은 우선 자만이나 교만이나 허식을 절대로 용인하지 않는다. 다음에는 탐욕이나 욕망이나 방탕이나 나약이나 그밖에 우리의 이기심이 빚어내는 죄악들을 전현 허락하지 않는다.(딤후3:2-5) 이와 반대로 자기부정이나 우리를 지배하지 않는 때에는 가장 추악한 죄악들이 부끄러운 줄 모르고 횡행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보기에는 선한 것이 있다해도 타락한 명예욕으로 더럽혀진다. 주의 계명에 따라 자기를 부정하지 않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아낌없이 친절을 베푸는 예가 있으면, 그런 사람을 내게 보이라. 자기 부정의 심정이 강렬하지 않는 사람은 선한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적어도 칭찬을 받기 위한 것이다.
3. 디도서 2장에 나타난 자기 부정
7. 보이는 사랑으로는 부족하고, 중요한 것은 의향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명랑한 얼굴이나 다정한 말로 유쾌하게 으;lan를 다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이어야 한다. 우선 그들은 자기가 도울 필요가 있다고 보는 사람의 처지에 자기를 두고 그의 불행을 자기가 당하며 견디는 것과 같이 동정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비와 인자의 정에 이글려 자신을 돕는 것과 같이 남을 돕게 되어야 한다.
각 사람은 자기가 아무리 위대할지라도 이웃들에 대해서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자인할 이며, 이웃에 대해서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자인할 것이며, 이웃에 대해서 친절한 일을 할 대에는 자기의 재력이 미치는 데까지 계속할 것이다.
재물을 베푸는 범위가 넓을 때라도 사랑의 법에 다라서 한계를 정할 것이다.
8. 하나님께 대한 자기 부정은 그의 뜻에 대한 헌신이다.
재산과 명예를 탐하며, 권력을 추구하며, 재물을 쌓으며, 호화롭고 사치한 생활에 도움이 되는 듯한 일에 광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우리의 욕망은 날뒤며 중단될 줄 모른다. 그와 반대로 가난한 살림과 낮은 가문과 이름없는 처지를 우리는 경탄하리만큼 무서워하고 미워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런 상태에서 빠져나가도록 우리는 자극을 받는다.
다라서 자신의 계획에 따라 생활을 정리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모두 얼마나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잇는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들은 야심이나 탐욕의 목표에도달하면 한편으로는 빈곤과 아첨을 피하려고 교묘하게 노력해서 지칠 정도에 이른다.
말씀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에 효과를 나타낸다.
우리의 마음이 어둡고 악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이 외부적인 증명만으로도 우리의 믿음을 불러 일으키는 데 충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헛된 것에 기울어져 있어서 하나님의 진리에 결코 이를 수 없으며, 우둔하여 항상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보지 못한다. 따라서 성령의 조명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믿음이 인간의 이해력을 훨씬 초월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성령의 능력으로 강화되고 지원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의 지성이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조명을 받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스콜라 철학자들의 생각은 지식에서 오는 단순한 동의를 믿음과 동일시 하고 성령의 확신과 확실성을 무시해 버린다. 그러므로 믿음은 두 방면으로 하나님의 특이한 선물이다. 사람의 지성은 정화되어 하나님의 진리를 맛볼 수 있게 되며, 마음은 그 진리를 확신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성령은 믿음을 불러일으킬 분만 아니라 점진적으로 성장하게 하여, 드디어 우리를 믿음으로 인하여 천국에 가도록 인도하신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바울은 말한다.(딤후1:14) 우리는 사도가 듣고 믿음으로써 성령을 받는다고(갈3;2) 한 말을 쉽게 설명할 수 있다.
34. 성령만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신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것은 성령에 의해서이다. (고전2:16) 그리스도게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게서 d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6:44 “아버지게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6:45)라고 말씀하신다. 일찍이 아버지를 본 사람이 없으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만이 그를 보았다(요1:18과 요5:37의 융합)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이글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에게로 갈 수 없는 것과 같이 일단 끌려가면 우리의 지성과 마음은 높이 들려 우리의 이해력은 초월한 경지에 이른다. 그 때에 우리의 영혼은 성령의 조명을 받아 이를테면 새로 날카로운 시력을 얻어, 이전에 눈을 멀게 했던 그 찬란한 하늘의 비밀을 보게 된다. 또 인간적인 이해력도 이같이 성령의 빛으로 조명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일들을 드디어 참으로 맛보기 시작하며, 이전에 심히 어리석고 미각이 둔하던 것과는 달라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두 제자에게 그의 나라의 비밀을 밝히 설명하려고 하셨으나(눅24:27)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하시기까지는 (눅24:45)아무런 발전이 없었다. 비록 사도들은 이렇게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배웠지만 그들이 귀로들은 바와 같은 교훈을 그들의 마음속에 부어 넣기 위해서는 진리의 영이 그들에게 오실 필요가 있었다.(요16:13)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태양과 같이 말씀이 선포된 모든 사람에게 비취지만 , 눈먼 사람들에게는 아무 효과가 없다. 그런데 이 점에서 우리는 원래 모두 눈이 멀었다. 따라서 성령이 내면적 교사가 되어서 우리의 마음을 비추시며,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올 길을 마련하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슴은 우리의 마음에 침투할 수 없다.
35. 사람은 성령이 없이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
39.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내주를 기뻐한다.고전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하는 데 그들이 성령을 모욕하지 않고서 어떻게 우리에게 대항하여 소리를 칠 수 있는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롬8:14) 고 언명한다.
“성령만이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롬8:16)하신다고 한다.그리스도의 영으로 감동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바울은 주장한다.(롬8:9) 바울은 우리가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복된 부활의 소망이 없다고 한다.(롬8:11)
바울은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계시다는 것을 모른다면 그 사람은 버림받은 것이라고 하였다.(고후13:5)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고 요한은 말한다.(요일3:24, 4:13)
P160 보복의 심판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원수에게 복수하신다. 즉, 그들에게 진노를 발하시며 그들을 혼란에 빠뜨리시며 흩뜨리시며 좌절시킨다. 그러므로 이것은 보복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당하며 도한 하나님의 진노와 결합된 벌이다. 경계의 심판에서는 하나님의 엄하심은 노여움에 이르지 않으며, 멸망시키려고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라서 이것은 벌이나 보복이라기보다는 교정이나 경고이다.
하나는 재판관의 행동이며, 또 하나는 재판관의 행동이며, 도 하나는 아버지의 행동이다. 재판관이 악인을 벌할 때에는 그의 범행을 헤아려 범죄 자체에 벌을 가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들을 엄격하게 교정할 대에는 복수나 학대하는 것이 아니고 가르치며 더 조심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아들에게는 교정이 시련과 개선이 되며, 노예에게는 태형과 벌이 된다.
32. 하나님의 보복과의 심판과 징계의 심판은 목적이 전혀 다르다.
벌이 보복일 때는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가 나타나며, 신자들에 대해서는 그런 것을 결코 나타내시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징계가 하나님의 축복이며, 그의 사랑을 증거한다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같다. (욥5:17: 잠3:11-12; 히 12:5-6)
이 구별은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통하여 충분히 지적되었다.
불경건한 사람들이 현세에서 당하는 고통은 이르테면 일종의 지옥의 통로를 우리에게 묘사해주며, 거기서 그들은 자기의 영원한 저주를 이미 멀리 바라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생활을 고치거나 유익을 얻는 것이 아니고, 이런 초보적인 경험이 도리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무서운 음부를 위한 준비가 된다.
주께서는 자기의 종들을 엄하게 징계하시지만 죽음에 내어주지는 않는다.(시118:18) 그러므로 그들은 주의 채찍으로 맞은 것이 자기들에게 유익하였고 자기들의 진정한 교육을 촉진시켰다고 고백한다.(시119:71)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상처를 입히시므로 그들 자신은 지옥의 벌과 별로 다름이 없는 것같이 느낀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그들이 당연히 그의 진노를 받을 만하며 그래서 그들로서는 자기의 악행을 싫어하며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려고 더욱 조심하게 되어, 간절한 마음으로 속히 용서를 비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을 증거하신다.
주게서는 징계가 주의 백성을 정화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가르치시지만 백성이 과도하게 지치지 않도록 징계를 완화하신다고 부언하신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건생활에 전심할수록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더욱 민감해지기 때문이다. 악인도 하나님의 채찍을 맞으면 신음하지만 , 그는 그 일을 숙고하지 않고 도리어 자기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기 때문에 , 그 마음이 더욱 굳어진다. 그렇지 않으면 심판자인 하나님께 대해서 불평을 말하며 반항하며 고함을 지르기 때문에, 그들은 격분과 정신착란으로 마비상태에 빠진다. 그러나 신자들은 하나님의 채찍을 경고로 생각해서 즉시 자기의 죄를 깊이 반성하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용서를 간절히 빌게 된다. 가련한 영혼들의 이와같은 고민과 슬픔을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의 진노의 징조만 보이더라도 백번이나 기절할 것이다.
33. 보복의 심판은 벌하기 위한 것이며 징계의 심판은 개선하기 위한 것이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채찍을 맞을 때에,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 이미 벌을 받기 시작햇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진노의 증거를 무시한다고 해서 벌을 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벌을 받는 것은 바른 정신을 차리시게 하시려는 뜻이 아니고 큰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이 심판자이시며 처벌자이심을 깨eke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자녀들이 지팡이로 맞은 것은 죄에 대한 처벌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고 회개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벌하시는 목적은 오직 교회를 겸손하게 만들며 회개시키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나라를 빼앗았을 때에는 그에게 보복의 벌을 내리셨다.(삼상15:23)
다윗의 어린 아들을 빼앗았을 대에는 그를 교정하려고 질책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1:32)
P165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신자는 낙망하지 말라
심한 고통을 받을 때에 신자는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마음을 무장해야 한다. 내 이름으로 일컫음을 받는 렘25:29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벧전4:17)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느끼는 심한 고통이 보복이라고 믿는다면 , 그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님의 손에 맞아 그를 처벌하는 자를 심판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의 진노와 적의밖에 볼 수 없으며, 하나님의 채찍을 저주와 영원한 정죄라고 해서 미워할 수밖에 없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은 아직도 자기를 벌하실 생각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채찍을 받아 결국 유익을 얻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죄에 대해 노하시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자비하시며 인자하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다면 예언자가 자기의 경험에 대해서 불평을 말하는 것과 같은 일이 생길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불신자들을 아끼시며 그들의 범죄를 무시하면서 , 자기 백성에게 엄격하실 때는 그것은 어려운 시련이 된다.
율법으로 훈계를 받을 대에 이것으로 인해서 신자들이 바른 길로 돌아갈 때는 그들의 구원에 대한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불경건한자들이 제멋대로 과오에 돌입하는 결과는 지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고 한다.
37. 죄인이었던 여인
향유를 부은 여인
예수의 뒤에 서서 발 곁에서 울며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셨다.
그녀는 죄의 용서를 받고 그 고마움을 표시하는 저 여인의 사랑을 보고서 너는 당연히 그녀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38 그리스도의 육신은 우리의 죄를 위한 유일하고 진정한 희생이다. 세례에서 완전히 소멸된 죄뿐만 아니라, 그 후에 우리의 약점을 통해서잠입하는 죄까지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온 교회는 매일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호소한다.(마6:12) 그리고 저 유일한 희생응 통해서 죄는 용서된다.
제5장 보속설에 첨부된 면죄부와 연옥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육체에 채운다고(골1;24)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모든 신자들이- 지상생활을 계속하는 동안 단련을 받기 위하여 당하는 고통과 관련시킨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으로 한 번 당하신 고난을 지금은 그의 지체들을 통해서 매일 당하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내게는 여러분에게 가는 문이십니다.
이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피로 준비된 그의 양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값을 인정하십시오 나는 그 값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전파할 뿐입니다.
제6장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가장 강렬한 동길르 그리스도 자신과 그의 구속행위에서 얻는다.
제7장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핵심
자기 부정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성이나 의지가 우리의 계획과 행동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을 다라 우리의 유익을 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말라.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대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전 소유를 잊어 버려라.
반면에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위해 살고 그를 위해 죽으라(롬14:8, 고전6:19) 그러므로 자기의 모든 능력을 바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자기를 떠나는 것을 - 이것을 제일보로 삼아라.
바울은 이것을 “심령으로 새롭게 됨”이라고 불렀다.(엡4:23)
기독교 철학은 이성에게 성령에 양보하여 항복하며 복종하라고 명령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제부터는 사람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살며 지배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게 한다.(갈2:20)
2. 하나님께 헌신함으로 자기를 부정함
여기서부터 둘째 요점이 나온다
즉 우리는 우리의 것을 구하지 않고, 우리가 자신을 거의 잊어버리고 자신에 대한 걱정은 물론 우리의 열성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명에 충실히 바치려고 노력한다면 , 그것은 위대한 전진을 했다는 증거가 된다. 자신에 대한 근심 걱정을 버리라고 명령할 때에, 성경은 소유욕과 권세욕과 명예욕을 우리의 마음에서 씻어버릴 뿐 아니라, 인간적인 영예에 대한 야심과 갈망 그리고 그 밖의 더 깊이 숨어 있는 해독을 송두리째 뽑아버린다.
자기부정 곧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섬기려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사역의 출발점에서 가장 절실하게 요구하시는 자기부정이다.(마16:24)
이 자기 부정이 일단 제자의 마음을 점령하면, 그것은 우선 자만이나 교만이나 허식을 절대로 용인하지 않는다. 다음에는 탐욕이나 욕망이나 방탕이나 나약이나 그밖에 우리의 이기심이 빚어내는 죄악들을 전현 허락하지 않는다.(딤후3:2-5) 이와 반대로 자기부정이나 우리를 지배하지 않는 때에는 가장 추악한 죄악들이 부끄러운 줄 모르고 횡행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보기에는 선한 것이 있다해도 타락한 명예욕으로 더럽혀진다. 주의 계명에 따라 자기를 부정하지 않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아낌없이 친절을 베푸는 예가 있으면, 그런 사람을 내게 보이라. 자기 부정의 심정이 강렬하지 않는 사람은 선한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적어도 칭찬을 받기 위한 것이다.
3. 디도서 2장에 나타난 자기 부정
7. 보이는 사랑으로는 부족하고, 중요한 것은 의향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명랑한 얼굴이나 다정한 말로 유쾌하게 으;lan를 다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이어야 한다. 우선 그들은 자기가 도울 필요가 있다고 보는 사람의 처지에 자기를 두고 그의 불행을 자기가 당하며 견디는 것과 같이 동정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비와 인자의 정에 이글려 자신을 돕는 것과 같이 남을 돕게 되어야 한다.
각 사람은 자기가 아무리 위대할지라도 이웃들에 대해서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자인할 이며, 이웃에 대해서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자인할 것이며, 이웃에 대해서 친절한 일을 할 대에는 자기의 재력이 미치는 데까지 계속할 것이다.
재물을 베푸는 범위가 넓을 때라도 사랑의 법에 다라서 한계를 정할 것이다.
8. 하나님께 대한 자기 부정은 그의 뜻에 대한 헌신이다.
재산과 명예를 탐하며, 권력을 추구하며, 재물을 쌓으며, 호화롭고 사치한 생활에 도움이 되는 듯한 일에 광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우리의 욕망은 날뒤며 중단될 줄 모른다. 그와 반대로 가난한 살림과 낮은 가문과 이름없는 처지를 우리는 경탄하리만큼 무서워하고 미워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런 상태에서 빠져나가도록 우리는 자극을 받는다.
다라서 자신의 계획에 따라 생활을 정리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모두 얼마나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잇는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들은 야심이나 탐욕의 목표에도달하면 한편으로는 빈곤과 아첨을 피하려고 교묘하게 노력해서 지칠 정도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