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청빙, 교역자청빙

칼빈의 성찬론



    칼빈의 성찬론에 대한 小考

■■. ‘개혁교회를 이끌고 가는 수많은 신조에서는, 교회를 가리켜 “예배하는 공동체”라고 일컫고 있다.  그리고, 교회의 정체성은 언제나 “말씀이 정확하게 선포되어지고, 성례전이 바르게 집례 되어지는 곳”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사실, 교회란 사도시대부터 말씀의 선포와 주님이 제정하신 성례전을 집례하는 것을 예배의 핵심으로 하였다. 이러한 예배를 통하여 혹독한 핍박의 늪에서 지친 육체와 신앙은 새로운 생기를 얻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굳세게 일어 선 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이었다. 그러하기에 주님의 부활을 상기하면서 모인 주님의 날인 主日은 전통적인 안식일 (토요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차원의 예배가 진행되었고, 거기서 무수한 신앙의 결단과 새로운 경험이 발생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어디서나 구원받은 감격을 증거하고 노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감격적인 말씀의 선포와 성례전의 집례는 위대한 설교자 아우구스티누스의 죽음을 끝으로 시들기 시작하여, 드디어는 교회는 암흑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암흑기 동안은 말씀의 예전은 흔적을 감추고, 성례전(세례와 성찬식)만이 기독교 예배에 남아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성례전마저도 형식화되고 미신적인 종교행사로 전락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바로 이러한 예배의 상실 속에 신음하는 뭇 성도들에게 새로운 서광을 안겨 주었다.  종교개혁의 기수였던 루터는 말씀의 예배와 성만찬 예전을 초대교회처럼 회복하여, 교회를 이어가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개신교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던 츠빙글리의 경우는 그러하지 못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예배에서 사라졌던 말씀의 예전을 회복하는데는 선두주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였으나, 반면 기존의 성만찬 예전은 연중 4회로 갖게 하는 중요한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개혁의 기치를 들고 말씀과 성만찬이 공존했던 예배의 복원을 위하여 전력투구했지만, 자신보다 15년을 앞서서 개혁의 뿌리를 내린 츠빙글리의 아성을 무너뜨린다는 것은 너무나 힘겨운 일이었다. 비록 위대한 석학으로서, 그리고 개혁의 지도자로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지만, 제네바 의회와의 싸움에는 승리를 거둘 수 없었다.  

(처음에 제네바에서 칼빈과 개혁주의자들이 스트라스부르크로 추방된 이유도 성례에 대한 합당한 시행을 두고 제네바 의회와의 충돌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것을 볼 때 합당한 성례의 시행은 교회의 본질과 불가불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는 예배란 말씀과 성만찬이 공존해야 한다는 주장을 실현시키지 못한 채, 이 땅위에 무덤마저 남기지 않고 그의 생은 끝을 맺었다.  비록 칼빈이 신봉했던 이 진리는 그 땅에서 빛을 보지 못하였으나, 그가 심혈을 기울여 남긴 기독교 강요」에서, 오늘도 다음과 같은 말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1년에 한 번 성만찬에 참여하도록 하는 관례는 분명히 악마의 농간이었다.  주님의 만찬은 

적어도 크리스천들이 매주 한 번은 참여할 수 있도록 거행되어야 한다.  사탄은 사람들로 

하여금 일 년에 한두 번 성만찬을 받을 수밖에 없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도들의 

본을 따르지 않은 것은 우리에게 큰 결점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21세기의 세계 교회의 구심점이 될 한국의 교회가 드리는 예배의 현장은 실로 부끄러운 현실이다.  말씀만이 살아 있는 집회의 성격을 유지한다고 하면서 (그것이 참된 복음에 정초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차지하고라도) 지난 한 세기를 지나왔다.  일 년에 한두 번의 성만찬 성례전을 거행하는 것은 ‘악마의 농간이라는 칼빈의  말은 전혀 들려지지 아니한 한국의 교회였다.  이 사실이 부끄러운 사실이라고 느끼는 예배의 인도자도 없었다.   칼빈의 신학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절대다수의 교회들마저 칼빈이 주장한 말씀과 성만찬의 균형잡힌 예배의 복원에는 무관심한 현실이다.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참된 예배란 말씀과 성례전의 살아있는 두 바퀴가 동일하게 움직이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교회가 초대교회와 같이 참되게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직면한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가 된다는 점에서, 칼빈의 성만찬에 대해서 논한다는 일의 중요성이 있다할 것이다. 


    칼빈의 성찬의 의미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은 세례라는 표시에 의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 받아들여졌음을 확증한다.  일단 하나님의 집에 우리를 받아들인 후, 하나님은 우리의 일생을 통해 우리를 양육한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양식을 공급받고 있음을 확증하기 위해 준 표시가 바로 성찬이다. 

  첫째로, 성찬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결합된 것을 나타내는 상징인 동시에 보증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 밖에 우리와 분리되어 있는 한, 그분의 공적은 우리와 무관한 것이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공적을 전달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결합되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와 결합될 수 있는가?   ‘우리가 이것을 믿음에 의해 얻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지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시적 표시로서 이 신비를 나타내 보여주신다.   성찬에서 경건한 영혼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고, 그의 것이 모두 우리의 것이 되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발견하게 된다.  물론, 성찬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결합된 것을 나타내는 상징일 뿐이며, 실제로 우리를 그리스도와 결합시키는 분은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성찬은 상징이지 실체가 아니다.  

그렇긴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상징을 보여주는 동시에 실체도 주는 것으로 믿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속이는 분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공허한 상징을 준다고 감히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성을 믿을 때, 성찬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결합된 것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보증이 된다. 

둘째로, 성찬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인 동시에 보증이다. 성찬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것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의 살이 우리의 양식이며 그의 피가 우리의 음료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 루터, 츠빙글리, 로마카토릭과의 비교 

   칼빈은 이 점에서 츠빙글리와 재세례파의 입장을 비판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을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먹는다는 말이나 마신다는 말은 단순히 믿는다는 말과는 다르다. 

“여기서는 내 말과 그들의 말 사이에 차이가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믿는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믿음 속에서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다고 말한다.” 

성찬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몸이 빵과 포도주에 의해 영양을 공급받듯이, 그리스도의 살은 영혼의 양식이며 그의 피는 음료다.  그래서, 성례는 영적인 것에 대한 일종의 유비이다.  칼빈은 이 점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의 화체설(성찬식에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바뀌어진다는 주장)을 비판한다.  만약 성찬에서 실체가 변화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참된 빵과 포도주가 아닐 것이다. 그러면 영적인 것에 대한 유비라는 성례 본래적 의미가 상실되고 말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칼빈은 루터파와 츠빙글리파의 논쟁을 화해시키려고 시도하면서 자기의 입장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우선 칼빈은 츠빙글리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신성으로는 우주에 충만해 있지만, 인성으로는 하늘에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성찬에 실제적으로 임재할 수가 없다.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와 땅에 있는 우리를 결합시켜 주는 분은 성령이다.  성령은 공간적으로 분리된 것들을 참으로 결합시킨다.  이 결합에 의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부터 생명을 얻는다.  성령께서 결합시켜 줄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도 우리와 그리스도의 몸을 결합시켜 준다.  

“그리스도의 신적 위엄과 본질이 하늘과 땅을 채우고 있다.  이것은 육체에까지 뻗어 있다.  그러므로, 성찬의 사용과 별도로 그리스도의 육체가 본질적으로 믿는 자들 안에 유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신성의 임재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과 우리를 결합시켜 그리스도의 수난의 공적을 전해주는 분은 성령과 그리스도의 신성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결합되고 참여하는 것은 성찬을 통하지 않고도 이루어진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 빵이 입과 목구멍에 들어가는 특정한 순간을 제외하고는, 머리가 지체로부터 항상 분리되어 있을 것이다.” 라고 칼빈은 루터파의 헤스후시우스를 비판한다. 성찬이 그 자체로 이런 결합을 이룩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놀라운 신비를 가시적 표시로 보여주기 위해 성찬이라는 성례를 준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칼빈은 성찬은 단순한 표시에 불과하며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고 본 츠빙글리파의 주장을 비판한다.  칼빈은 하나님이 공허한 상징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상징과 함께 실체를 주는 것이라고 한다. 성찬과는 별도로 성령의 역사에 의해 그리스도와 우리를 결합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게 하는 하나님이 성찬을 주면서 공허한 표시를 줄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이 참으로 임재한다고 말한다. (칼빈은 ‘실제적 임재’라는 표현보다 ‘참된 임재’라는 표현을 더 좋아한다.) 

   우리는 여기서 루터, 츠빙글리, 칼빈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츠빙글리에게 있어서 성찬은 단순한 표시였다. 루터에게 있어서 성찬은 실재였다. 그러나 칼빈에게 있어서 성찬은 불가시적 실재에 대한 가시적 표시였다.  츠빙글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었다.  루터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몸을 먹는 것이었다.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는 것은 성령의 연결에 의해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몸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칼빈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opus operatum 이라는 교리를 비판하면서 성찬에 있어서 신앙을 강조한다. 

“교황주의자들은 성례는 치명적인 죄의 장벽이 없는 한 유효하다고 말한다.  거기에 신앙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  예컨대 어떤 사람이 신앙은 조금도 없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식탁에 참여한다면, 그의 몸과 피를 받을 뿐만 아니라, 그의 죽음과 부활의 열매를 받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칼빈은 “그들은 성례에 대해 주술적인 힘을 부여한다”고 비판한다.  마치, 단단한 바위 위에 비가 떨어지면 흘러 내려가 버리듯이, 신앙이 없이는 성례에서 주어지는 은총을 받을 수 없다.  칼빈은 이 점에서 불신자들도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받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정죄가 된다는 루터파의 주장을 비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합당하지 않게 받음으로써 죽음에 이른다고 말한 것을 어느 곳에서나 찾아 볼 수 없다. ”

칼빈은 성찬 안에 그리스도의 실제적 몸이 임재해 있기 때문에, 합당치 않은 자가 성찬을 받으면 그에게 정죄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 때문에 정죄가 된다고 보고 있다.


■.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 

칼빈은 자기의 견해를 강화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을 자주 인용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살펴보고 칼빈의 견해와 비교해보기로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츠빙글리나 칼빈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으로는 편재하지만, 그의 인성으로는 하늘에 있다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다르다누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하나님으로서는 모든 곳에 전체적으로 임재하며, 또한 하나님의 동일한 성전에 거하지만, 참된 몸으로는 하늘 어떤 곳에 있음을 의심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한다. 

그러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츠빙글리처럼 성찬을 단순히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의식으로 보았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는 구절을 설명하면서, “우리는 그의 살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고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을 기쁘고 유익하게 기억 속에 간직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구절은 츠빙글리의 견해를 지지해 주는 것 같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는 그의 몸과 피의 유익한 음식을 우리에게 주었다”고 말했으며, “만약 어떤 것을 성례를 통해 가시적으로 먹는다면, 진리 안에서 영적으로 먹고 영적으로 마신다”고 말했다.  이 구절들은 성찬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의식이라는 츠빙글리의 설명을 넘어서고 있음이 분명하다.

어거스틴은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도 그 안에 거하시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육신으로 또 보이게 그 몸과 피의 표징을 이로 씹을지라도, 영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살을 먹으며 피를 마시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또 어거스틴은 불경하고 불결한 사람들에게는 표징을 먹는, 보이는 행동 이외에 아무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대의 입을 준비하지 말고 마음을 준비하라.  이 만찬은 마음을 위해서 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라, 우리는 그리스도를 신앙으로 받을 때에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를 받을 때에 우리가 생각하는 바를 안다.  우리는 적게 받으나 그것으로 마음의 영양을 얻는다.  그러면, 양식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다.”   여기서도 어거스틴은 악인들이 먹는 것을 보이는 상징에 국한시킨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신앙으로만 받는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그는 “성례는 선택된 사람들에게서만 그 상징하는 결과를 나타낸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악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일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결론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라고 말씀하실 때에 (요 6:56 ), 예수께서는 그의 몸을 예전적으로 먹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먹는 것이 무엇인가를 밝히신다.  그 뜻은 곧 그리스도께서 먹는 사람 안에 거하시게 하기 위해서, 먹는 사람도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바꿔 말한다면, 내 안에 거하지 않고 나도 그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은, 내 몸을 먹거나 내 피를 마신다고 말하지도 말고 생각하지도 말라는 말이 될 것이다.  칼빈은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에서 그 권능이 분리될 수는 없지만, 예전적으로만 먹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참으로 또 실제로 먹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각 사람은 각기 자신 속으로 내려가서 홀로 깊이 생각해야 한다.  자기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구원을 충심으로 믿고 의지하는가? 그 믿음을 고백하는가? 그리고, 깨끗하고 거룩한 열심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애쓰는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형제들을 위해서 자기를 주며 함께 그리스도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나누어 줄 용의가 있는가? 자기가 그리스도의 지체로 인정되는 것과 같이 자기편에서도 모든 형제들을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생각하는가? 자기는 그들을 자기의 지체로서 아끼고 보호하며 돕기를 원하는가? 이런 것들을 먼저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과 사랑에 관한 의무들을 우리가 지금 완전히 행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것을 목표로 정성껏 노력하며 향상시켜서, 일단 출발한 우리의 믿음이 매일 자라도록 하라는 것이다.     


성찬의 목적 

■. 성찬이 주는 약속의 의미 

 그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그의 피는 참된 음료며(요 6: 55), 그것을 먹는 우리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요 6:54) 선언하신 그 약속을 확인하는 것이 성찬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생명의 떡이라고 선언하시면서, 그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고 하신다. (요 6: 48,50)  그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서 성찬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보낸다.  십자가에서 약속이 실천되며 모든 점에서 성취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지 않는다면, 즉 우리가 그의 죽으심의 효력을 산 체험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또 구원에 이르도록 먹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영생의 양식으로 주셨고, 그리스도도 자신을 그렇게 나타내셨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의 죽을 성질을 공유하게 되심으로써, 그의 신적인 영생을 우리에게 나눠주실 때, 또 자신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우리가 받을 저주를 자기가 받으시고 자신의 축복으로 우리를 가득하게 하실 때, 스스로 죽으심으로써 죽음을 삼켜 없애실 때(벧전 3:22, 고전 15:54 참조), 그리고 부활하셔서 그가 입으셨던 우리의 이 썩을 육을 영광과 썩지 않음으로 입히실 때에(고전 15: 53-54), 그분은 자신이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심을 나타내셨던 것이다. 


■. “생명과 구원에 대한 우리의 확신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존한다는 것을 사람들 앞에서 이구동성으로 고백하며, 우리의 고백으로 주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의 모범으로 다른 사람들도 주에게 영광을 돌리도록 권고하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성찬의 목적이 분명히 나타났다.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하도록 우리를 훈련하는 것이다.   ‘주의 죽으심을 (심판하러) 오실 때까지 전하라’는 명령은 (고전 11: 26 ) 우리의 믿음이 성찬에서 인정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우리의 생명이라는 것을- 우리의 입으로 고백하며 선포하라는 뜻에 불과하다.  이것이 성찬의 둘째 사용법이며 외형적인 고백으로 나타난다. 


■. 성찬은 사랑의 유대이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한 편으로는 순결하고 거룩한 생활을, 다른 한 편으로는 사랑과 평화와 화목을 권장하며 고취하는 가장 유력한 방법으로서 성찬을 제정하셨다. 이 참여에 의해서 우리가 모두 한 몸이 될 필요가 있다.  성찬에서 제시되는 떡은 이 단결을 포함한다.  떡은 많은 밀알로 만들었으나, 그 밀알들이 섞여서 서로 구분될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도 한마음으로 일치 단결해서 어떤 불화나 분열도 침입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아무 형제라도 상하게 하거나 멸시하거나 배척하거나 박대하거나 그 밖의 어떤 모양으로든지 넘어지게 한다면, 우리의 비행은 반드시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를 상하게 하거나 멸시하거나 박대하게 된다.  우리의 형제들과 불화하면 반드시 동시에 그리스도와 불화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반드시 형제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된다.  형제들은 우리의 지체이므로, 우리 자신의 몸과 같이 그들의 몸을 돌보아야 한다.  몸의 일부에 고통이 있으면 그 고통은 전신에 퍼지는 것과 같이, 우리는 한 형제가 어떤 곤란을 받으면 버려 두지 말고 깊이 동정해야 한다. 

따라서, 어거스틴이 자주 성찬을 ‘사랑의 유대’라고 부른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면서 우리도 그를 본받아 서로 헌신을 약속하며 실행하라고 권고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우리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주심으로써 우리를 그의 안에서 모두 하나가 되게 하고 계시는데, 무엇이 우리가 서로 사랑할 것을 이보다 더 날카롭게 자극할 수 있겠는가 ? 


■. 하나님 앞에 우리가 가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타당성은...

거룩한 잔치는 병자를 위한 약이며 죄인을 위한 위로이고 빈민을 위한 희사라는 것과, 건강하고 의롭고 부요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에게는 아무 유익도 없으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성찬에서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양식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먹지 못하면 신체의 힘이 없어지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굶주려 기절하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주신 것이므로, 우리 안에 그가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분명히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타당성은, 우리의 추악함과 우리의 소위 합당치 못함을 하나님에게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를 그의 앞에 서기에 합당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우리 자신에게 실망함으로 하나님 안에서 위로를 얻는 것이고, 우리 자신을 낮춰서 하나님께서 들어올리시게 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을 고발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게 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찬에서 권면하시는 그 연합을 갈망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사람을 그 안에서 하나로 만드시므로, 우리도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한 정신과 한 마음과 하나의 말을 원하는 것이다. 

이런 일들을 곰곰이 생각한다면, 이런 생각들이 우리를 놀라게 할 수는 있으나 결코 절망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 선한 것도 없고 죄로 더럽혀져서 거의 죽게 된 우리가 어떻게 주의 몸을 합당하게 먹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생각을 고쳐야 한다.  즉, 우리는 빈민으로서 친절한 희사자에게 가고, 병자로서 의사에게 가며, 죄인으로서 의롭게 만드시는 분에게, 그리고 죽은 자로서 생명을 주시는 분에게 간다고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타당성은, 첫째로 만사를 그리스도에게 의지하고 우리 자신에게는 아무 것도 의지하지 않는 믿음에 있으며, 둘째로는 비록 불완전할지라도 하나님께 드리기에는 충분한 사랑에 있다고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완전한 사랑을 드릴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불완전한 것을 키우시며 더 좋은 것으로 만드신다.  성찬은 완전한 사람들을 위하여 제정하신 것이 아니라,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곧 약한 사람들을 각성시키며 고무하고 자극하며, 그들의 믿음과 사랑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아니 그들의 믿음과 사랑의 결함을 시정하기 위해서 제정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성찬은 자주 집행하라 

■. 그리스도의 수난을 자주 회상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주 성찬을 받도록 제정하셨고, 자극을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수난을 자주 회상하고, 이런 회상에 의해서 믿음을 강화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노래를 드리고 하나님의 자비를 선포하며, 또 성찬을 자주 받음으로써 상호간의 사랑을 증진하고, 서로 사랑을 증명하며,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단결하는 데서 사랑의 유대를 인식하게 하셨다. 

거룩한 분들은 이런 법을 정해서 자주 성찬을 받는, 사도들 자신이 정한 관습을 유지하며 보호하려고 한 것이 분명하다.  빈번한 성찬 참여가 신자들에게 유익함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등한시해서 점점 폐지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자기 시대에 대해서 말했다. 

“ 이 일의 신비는- 즉 그리스도의 몸의 연합의 신비- 어떤 곳에서는 매일 주의 식탁에 진설하며 매일 그 식탁에서 받는다.  어떤 곳에서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받는다.  어떤 사람들은 받고 생명을 얻으며, 어떤 사람들은 멸망에 이른다.” 

일년에 한 번 성찬에 참여하라고 하는 이 관습은 누가 처음으로 시작했든 간에 분명히 마귀가 만든 것이다.  주의 식탁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에 진설해서 성찬이 선언하는 약속으로 우리를 영적으로 먹이게 하는 것이 옳다. 

“잘 조직된 교회의 예배는 성도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면, 자주 성만찬을 거행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성도들이 약하므로 너무 자주 거행하면 이렇게 거룩하고 훌륭한 신비가 경멸을 받을지도 모르는 위험 부담이 있다.  성만찬을 한 달에 한 번 거행하는 것도 우리에게는 유익하다고 본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마치는 글 

 칼빈의 성찬론에 대해 지금까지 서술된 것을 개략적으로 요약한다면 아래와 같다. 

1. 주님이 우리의 구속을 이루셨고 이것과 떨어져서는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그리스도의 몸은 이 세상 넘어 하늘에 계시지만, 성찬에 참여할 때 우리와 교통하며, 그리고 인간이 가진 모든 속성을 담고 있다.  베드로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주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오실 때까지 하늘에 계신다.  주님의 몸은 두 장소에 동시에 계실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는 나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실 때, 주님은 자신의 육체적인 현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이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라고 말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바로 앞에서 한 말은 주님의 인성이나 육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성과 위엄을 언급한 것이다.  성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계시지만, 성례전적인 행동이 베풀어지는 곳마다 거기에 머무르시며, 그리고 세상 끝날까지 거기에 남아 계신 것이다.

2. 그리스도의 몸과 함께 나누는 친교는 성령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우리의 영혼은 성령에 의해서 하늘로 올리워지며, 거기서 그리스도의 몸에서 우리에게 옮겨온 생명에 참여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비록 몸은 우리와 떨어져 있으나, 우리 안에 성령으로 거주하시며, 주님은 우리를 하늘로, 주님 자신에게로 끌어올리신다.  마치, 태양 광선이 그 생기 넘치는 따스함으로 우리에게 넘치는 힘을 주는 것처럼, 우리에게 주님의 육신이 주는 생명력 넘치는 활력을 부어 주신다.  성령의 무한한 에너지는 어떤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생명을 그리스도의 육신으로부터 우리에게 부어 넣어 주신다.  이것은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능력임을 말하고 있다. 

3.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일은 ‘영적인 방식으로’ 그 살을 먹는 ‘하늘의 행동’이다.  비록 그리스도가 생명을 자신의 살과 피로 우리에게 불어넣으실 지라도, 실체가 조금이라도 섞인다는 것은 부인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살과 피의 실체에서 생명을 받지만, 여전히 전인으로서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시기 때문이다.  칼빈은 실제적인 교통과 실제적인 선물이 근본적으로 실체가 조금이라도 섞이지 않고 주입되지 않은 채 주어졌다는, 이러한 방식의 참여를 자연적이거나 육적인 방식으로 참여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것으로서 ‘영적인 참여’라고 부른다.

4.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임재는 성령으로 실제로 임재하고 그리스도가 강림한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천상의 임재 방식’이며,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몸은 땅에 위치하지 않으며, 빵과 포도주에 연루되어 있지 않고, 빵과 포도주에 부착되어 있지도 않다.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강림은 “주님이 우리를 자기 자신에게로 위로 올리는 유형의 강림이다.” 주님이 강림하는 것은 바로 성령에 의해서이지만, 내려오시는 분은 성령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외적인 상징뿐만 아니라 주의 영으로 내려오신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셔서 성찬에 임재하신다는 것은 주께서 정말로 자기 자신을 객관적인 실체로 나타내는 은총의 사건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가 주님을 거기에 머무르게 하고서, 주님을 단순히 자신의 능력의 지배를 받는 이 세상의 일부로서 간주할 수 있다는 이러한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스도의 육신은 ‘살아있는 영적인 성전’이며,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는 하늘의 양식’이다. 


■.성찬 교리에 대한 칼빈의 기여는

1. 명료하게 하였다. 

2. 신비를 보존하였다.

3. 불합리한 것들은 회피하였다.

4. 신앙규범과의 일치를 준수하였다. -철저히 기독론에 근거하고 있다.

5. 참된 종말론적인 긴장이 유지되었다. - 칼빈은 하늘은 이 땅에서 옮겨진 장소라는 자신의 주장을 따르면서, 승천을 더 분명하게 이 세상의 심판으로서,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 세상 저편이 있고, 이 세상 위에 있는 운명을 가리키는 사건으로 바라본다.  앞으로 그리스도의 백성은 마치 천사들이 ‘너희들은 주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다시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한다. 주님은 홀로 하늘을 차지하시려고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우리들과 모든 신앙인들을 주님과 함께 모이게 하려고 들어가셨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이 세상 저편에서 다가올 왕국을 기대하면서 살아야 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승천은 이 세상의 한계를 초월하지만, 여전히 그 영역 속에 이 땅을 포함하고 있는 나라를 그리스도가 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림은 칼빈에게 단지 이 세상에서 항상 숨겨진 방식으로 현존하는 것을 보이도록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세상을 여지없이 뒤흔들고 세상을 초월하는 사건이다. 참으로 이것은 세상 저편에 있는 나라가 이 세상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정말로 저 멀리 가셨으며, 주님의 성찬 교리는 승천의 실재와 그리스도의 몸의 참된 하늘의 영광과 위엄을 보호하려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지체들은 이미 주님의 몸과 접목되어 주님의 나라의 하늘의 영광 속으로 들어갔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로서는 누릴 수 없지만, 이 세상 저 편에 있을 유업을 약속 받았으므로, 계속해서 소망하며 기다려야만 한다. 따라서 칼빈은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고양된 상태를 강조하고 성령의 사역을 강조함으로써, 성찬에 관한 참된 교리라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종말론적인 강조를 보존하였다. 

6. 말씀에 대한 강조. - 그러므로 성찬을 거행하기 전에 설교가 선포되는 것은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말씀은 ‘선언된 것이라기보다는 이해된 것’이기 때문이다.  성찬이 그 힘을 획득하는 것은 ‘알아듣기 쉽게 선포되는’ 말씀에 기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소유와 주의 영적인 선물들을 얻는 것은 빵과 포도주의 물질로 말미암은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약속으로 말미암아 주께 인도되었고, 주님은 스스로 우리의 것이 되시고, 믿음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이 표징으로 우리에게 약속하셨고 제공하시는 것을 모두 이루신다. 

7. 다른 의식들을 도입함으로써 성찬의 의미를 흐려지게 해서는 안된다. - 그들이 성직의 능력과 효능이 다 떨어져서 강단에서 차갑고 무관심하게 몇 마디 말을 하였을 때, 의심의 여지없이 우상들이 기독교 성전에 들어왔다.  바울은 참된 설교에서 그리스도가 ‘분명히 보여지며, 말하자면 우리 눈앞에서 십자가에 달리신다’고 증거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가 받을 저주를 담당하기 위하여 죽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그리고 신실하게 가르침을 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언약을 베푸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님 자신을 위하여 행동하신 형식들을 훨씬 간단하게 주셨다는 사실이다.  비록 사람들이 외적인 의식들로 많은 수고를 했다고 할지라도, 하늘의 진리를 무시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권위의 다스림을 받기를 거절하는 것이므로, 그들의 불경건한 태도는 자신들의 완고한 불복종으로 말미암아 드러나고 말 것이다.  지식이 없으면 우리가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존재하지 않는 허깨비나 우상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아무리 선한 의도라고 할지라도, 말씀이나 하나님의 명령이 없으면 자기들의 생각을 따르는 실수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을 예배한다.”라고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에 대해서, 칼빈은 “이것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말씀이며 신앙적인 것은 어느 것이든지 분별없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시도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불필요한 예배 양식을 도입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나타내셨던 참된 상징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주의 교회에서 소외시키는 것이며, 하나님의 교회를 더럽히는 것이다.  


두렵고 떨림이 내 안에 있는가?  그분의 피에 대해 나는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  초대교회 교인들은 그 잔을 들고 어떤 눈물을 흘렸는가?  주님, 죄인중의 죄인, 죄인 중의 괴수가 손들고 주 앞에 갑니다.  용서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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