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청빙, 교역자청빙

돌이킴


돌이킴[D.M.로이드존스]

돌이킴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옛 삶의 형태가 끝나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새로운 본성의 첫 체험입니다. 무엇인가로부터(from) 무엇인가에게로(to) 전환함에 있어서 중생한 영혼의 첫 행동입니다. 즉 하나님과 연관해서 영혼이 시작하는 의식적인 역사의 첫 발걸음입니다. 그것은 중생에서 받았던 새로운 삶의 첫 경험, 즉 첫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 모든 남녀는 죄악으로부터 나와야 하며 또한 다른 조건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우리는 모두 죄악 중에 출생하였고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습니다”(시51:5). 우리는 모두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했던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엡2:3). 우리 모두는 원죄와 죄책을 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돌이킴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것에 대하여 아주 분명합니다.

 

돌이킴은 어떻게 발생합니까? 그리고 돌이킴에 있어서 집행자는 누구입니까? 여기서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가장 먼저 주요한 것은 바로 성령님의 사역인데, 성령님께서 그을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통하여 행하십니다. 우리는 이 교리를 고찰해 왔고 또한 그것이 돌이킴의 과정이 발생하는 방법입니다. 부르심은 효과적이 되는데, 또한 그것은 여러분들과 저를 다음 단계로 인도합니다.

소명은 효과적으로 옵니다. 소명에 관하여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기 때문에 그것이 효과적으로 옵니다. 소명과 반응이라는 이 두면-이것이 바로 돌이킴입니다. 돌이킴을 살핌에 있어서 우리는 필수적으로 인간의 행동에 대한 동일한 강조를 해야만 합니다. 중생과 연합에 있어서 우리는 절대적으로 수동적입니다. 우리는 전혀 어떤 역할도 하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성령님의 역사만이 우리 가슴에 있습니다. 그러나 돌이킴에 있어서는 우리는 행동하며 움직입니다. 우리는 부르심을 받아 그것을 행해야 합니다.

 

두가지 거짓 돌이킴

1. 일시적인 돌이킴.

요한복음 6장을 살펴보면, 사람들은 주님을 따랐고 그분의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5천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그들을 일부러 반박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신들이 제자라고 생각했던 많은 사람들이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주님을 따르지 않았다고 우리는 듣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그 가르치심을 의도적으로 주셨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영과 육사이의 구분을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육적이라는 것을 주님께서는 아셨고, 또한 주님께서는 영을 붙잡는 것이 생명의 중요성임을 강조하시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있는 비유-씨뿌리는 자의 비유 - 와 이것에 대한 우리의 주님 자신의 입장을 살펴봅시다. 특별히 20절과 21절을 살펴 보십시오: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마13:20-21절). 우리의 주님께서 이 사람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 지에 주목 하십시오: 그는 ”즉시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말씀드리려는 일시적인 돌이킴입니다. 그는 말씀을 받았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기쁨에 가득 찬 것처럼 보였지만 자신 안에 뿌리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 이유였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즉 이런 기쁨 돌이킴의 가능성이 있으나 생명과 살아 있는 의미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없기에 이것은 일시적인 것을 증명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전서 1:19-20절에서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 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지금 이것은 매우 심각한 가르침입니다. 그는 동일한 가르침을 디모데 후서 2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신자였던 것처럼 보였으나 이제는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에 관하여, 그리고 그 결과 약간의 두려워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교회가 붕괴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에 대하여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씁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19절)는 이 점은 옳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그분은 속임 당하거나 만홀히 여김을 당하지 않으십니다. 일시적인 돌이킴들과 일시적인 신자들이 있습니다만 그들은 참 신자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진짜 돌이킴이 무엇인지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을 알아야만 하는 생명과 같은 이유입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렸다”(딤후4:10절). 히브리서 10장 안에서도 비슷한 구문이 있습니다.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6:4-6).

 

반짝인다고 해서 모든 것은 금이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돌이킴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이 우리 주님의 가르침과 영감된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돌이킴이 확실하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이런 질문들을 해서는 안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위험하고 비난받아 마땅하며 나아가 비성경적이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그런 것들이 잘못된 이해에 근거한 일시적인 돌이킴이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2. 가짜 돌이킴

일시적인 동이킴은, 성경적 진리를 제시한 결과로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짜 돌이킴은 비록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돌이킴과 매우 비슷하지만, 진리가 아닌 다른 것에 의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구분을 해야만 합니다.

이런 구분이 오늘날보다 더 필요한 때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삶에서 큰 변화가 있는 한 사람들은 가짜 돌이킴을 진짜 돌이킴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죄를 멈추고 선한 삶을 살며 선행을 하면 사람들은 그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나와서 교회에 가입할 수 있으며 외부로부터 그들의 전체 삶은 확연히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짜 돌이킴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 것으로부터 떠나서 다른 것도 도달했다는 그런 의미로의 돌이킴입니다. 즉 죄로부터 떠나 선행을 산다는 것일 뿐 그것은 가짜 돌이킴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진리와의 필수적이며 본질적인 관계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결단코 기독교 신앙의 변증은 당신이나 제가 경험한 어떤 체험에 근거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기독교 신앙의 변증은 객관적인 진리에 두어야 합니다. 돌이킴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 이 시점에서 우리가 주의하지 않는다면, 이런 가짜 체험들 중 하나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아무 말도 말 수 없게 된다는 것이 바로 위험입니다.

 

돌이킴의 다양한 국면들

☞ 돌이킴에 있어서 시간적인 요소

돌이킴은 갑자기 일어나야만 합니까? 아니면 그것은 점진적으로 가능합니까? 사실 저는 갑자기 발생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순간적이든 아니면 점진적이든 그것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적 요소는 절대적 본질의 하나는 아닙니다. 그것은 중요할 수 있지만 생명적인 것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 돌이킴은 필수적으로 극적이어야만 하는가?

만약 여러분이 성경의 한 장-사도행전 16장-만을 읽어보신다면, 여러분은 이것을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단지 빌립보 감옥의 이야기만을 읽으신다면, 돌이킴은 극적인 것이 되어야만 한다고 말할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루디아에 대한 이야기에 동일하게 흥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그녀의 돌이킴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너무나 조용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동일하게 돌이킴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다른 종류의 요소를 가지게 됩니다. 돌이킴에 있어서 극적인 면이 있을 수 있지만, 또한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극적인 것이 본질적인 것은 아닙니다.

 

☞ 돌이킴에 있어서 감정에 대한 질문

감정의 자리에 대한 오래된 격한 질문이 있습니다. 물론 감정에 있어어 감정이 계속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 감정들은 매우 강할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또한 그렇지 않을 수 있는데 이것 역시 감정입니다. 우리 모두는 성품과 기질에 있어서 서로 다르며 이런 감정에 있어서 진실로 다릅니다.

감정은 다양하며 또한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표현되는 방식 역시 다양합니다. 감정들은 표현될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우리의 내부에 어떤 특별한 감정을 소유하라고 명령한다거나 아니면 그런 감정을 표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금하셨다는 점입니다.

 

☞ 돌이킴에 있어서 연령의 문제

어떤 사람들은 여러분들이 청년기에 돌이키지 않는다면 전혀 돌이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는 필요한 심리적인 요인들이 다시 있을 수 없기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주장입니까! 얼마나 비성경적입니까! 돌이킴에는 나이의 제한이 없습니다. 나이는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청소년들뿐만 아니라 무덤과 지옥의 가장자리에서 와들거리며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소망이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참된 돌이킴에 관심만 있다면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심리적인 체험에 관심이 있다면 청년기가 적격이라고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심리적인 변화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참된 기독교의 영적 돌이킴에 대하여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연령은 전혀 상관이 없다는 점입니다.

 

☄ 주의 할 점

우리는 돌이킴의 특별한 현상들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감정들은 단지 돌이킴의 현상들 중 한 부분일 뿐이지만,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들에만 우리의 모든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극단적으로 위험한 것이 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제가 지적했던 것처럼 감정들은 여러 종류들 중 하나이며 또한 감정에만 의존하는 것은 비극으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본질적인 것이 아닌 여러 가지의 현상을 돌이킴에 반드시 나타나야 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본질적인 것으로 생각하고서는 그것을 경험하지 않았으면, 그들은 결코 돌이키지 않았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불필요한 불행으로 이끌어갑니다.

 

☄ 하나님의 백성들의 동일성

하나님의 남녀들은 항상 동일했습니다. 그들은 어느 곳에 있었든지, 그들이 어느 지방의 춮신이든지, 어느 세기였는지 혹은 언제였는지 저는 상관치 않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남녀이며, 또한 그들이 무엇이 되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관계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수세기를 지나서 변함이 없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21세기에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특별한 유형이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에게 누군가 그런 특별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믿지 마십시오. 그들은 동일해야만 하며 그들은 항상 동일했습니다.

초기의 사람들을 읽어보십시오. 중세와 종교개혁의 시기 그리고 청교도 시기, 나아가 18세기 복음주의자들을 읽어보십시오. 그들은 항상 동일합니다. 어떤 한 사람들 읽으면 또 어떤 한사람을 연상하게 될 것입니다.

 

☄ 돌이킴에 있어서 영속적 요소들

그렇다면 돌이킴에 있어서 영속적인 요소들은 무엇입니까? 돌이킴에는 두개의 본질적인 요소가 있는데, 이것들은 성경 어느 곳, 즉 복음서에서 그리고 사도행전과 서신서들 모두에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0:21절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니라, 그리고 너희는 내가 너희들에게 말했던 것들을 간직하고, 너희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가 행했던 것을 기억하라” 이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들이 바로 돌이킴에 있어서 유일한 본질적 요소들입니다. 회개이며 믿음입니다.

순간적이든 혹은 점진적이든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회개가 그곳에 있어야 하고 또하 믿음이 그곳에 있어야만 합니다. 만약 하나가 없다면 그것은 돌이킴이 아닙니다. 둘은 본질적입니다.

여러분들이 회개할 수 있기 이전에 일반적인 믿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여러분들이 하나님에 관한 어떤 것들을 믿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그것에 어떤 반응도 보일 수 없고 회개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특별한 의미에서 믿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 회개는 믿음 이전에 오고 따라서 바울은 이런 순서로 언급했던 것입니다.

 

왜 회개가 먼저 와야 합니까?

신약의 최초의 선포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는 무엇을 선포했습니까? 바로 “죄 사람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막1:4)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구자의 그 메시지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선포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복음서를 살펴보신다면 주님께서 백성들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5)고 말씀하신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세례요한과 완전히 동일하게 주님께서는 회개를 가장 먼저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무엇을 가르쳤습니까?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날의 우대한 설교를 봅시다. 베드로는 설교했고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형제들이 우리가 어찌할꼬”, 다음과 같은 것이 바로 베드로의 응답이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8). 회개하라. 제가 이미 인용한 것처럼 회개는 사도 바울의 메시지이었습니다. 그는 회개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는 아덴에서도 그렇게 했습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17:30).

회개가 필수적인 첫 번 째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확실하게 그렇게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성경적입니다.

 

왜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만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물을 것입니다. “왜 나는 그분을 믿어야만 합니까? 그것은 완전히 공허한 질문입니다.

만약에 사람들이 회개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의 필요성을 보지 못합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한 동역자, 혹은 한 친구, 혹은 몸의 한 치료자로 초청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돌이킴은 아닙니다. 그런 것은 결단코 돌이킴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만 합니다. 율법은 우리의 몽학 선생으로(갈3:24) 우리로 하여금 그곳에 이르게 하고 회개토록 역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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